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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 정보
역사 대평면지 大坪面誌
대평면지편찬위원회
출간일 | 2006년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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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
페이지 | 1048페이지 / 판형 190*257 / 양장제본 |
가격 | 비매품 |
저자명
■발간사
대평면지편찬위원장 정 인 석
대평(大坪)이라는 추억(追憶)의 장(場)을 열며
우리 대평면은 고대 선사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지리산의 정기를 이어 받고 지리산에서 발원한 경호강과 덕천강의 풍요한 물줄기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이루어 농경문화의 꽃을 피워 민심은 순박하고 산업은 풍요로웠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남강댐이라는 국가적 사업을 필요로 하였고 우리의 삶의 터전 대부분을 진양호에 묻어 버리고 지금은 추억을 더듬으며 새로운 발전을 향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고향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야 어른 아이 다름없겠지만 어른들은 진양호 물 속에서 추억을 더듬고, 아이들은 추억을 회상하는 어른들의 마음에서 애틋한 향수를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향토애로 뭉쳐 어느날 저는 면지를 편찬하자는 뜻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야겠다는 흐뭇한 마음을 가지고 회의에 참석하였다가 몇 번의 고사에도 불구하고 뜻밖에도 편찬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바르게 기술하여 미래의 삶에 대한 교훈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역사적 인식보다는 추억과 기억의 보전이 더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인문지리적 역사는 진양지 등 과거와 주위에서 편찬한 많은 역사서에서 그 면목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근세의 모습과 발자취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득한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릴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아직은 많은 분들이 추억 속에 살고 있으며, 특히 편찬위원 중에는 눈을 감고도 풍경을 말하고 귀를 막고서도 대화를 할 수 있는 분들이 많아 마치 과거의 삶을 그대로 옮겨 놓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면지편찬 과정에서 자료수집의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으나 몸과마음을 다하여 헌신해 주신 편찬위원과 간접적이나마 성의를 다해주신 추진위원, 그리고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하는 향우회의 열화와 같은 지원에 감사를 드립니다. 고마우신 분들의 면면을 성명으로 밝히지 않는 것은 그 감사한 마음을 더욱 깊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제 대평면은 새로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창조의 신화를 엮어가면서 풍요한 추억의 장을 열어 과거와 미래를 함께 하면서 현재의 삶을 보람있게 가꾸어 가기를 바라면서 대평면지가 고향을 알고 알리는데 널리 활용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머리말
추억(追憶)만으로 편안하고 넉넉해지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바로 고향(故鄕)일 것이다. 비록 몸은 멀리 떠나 있지만 가슴 저만치 선명히 살아있고, 그 이름만 들어도 설레고 그리운 곳 대평면(大坪面).
끝없이 펼쳐진 너른 들판엔 노랗게 익은 벼가 물결치고, 밭일을 마치고 지천에 널려있는 시원 달콤한 대평 무를 한 입 베어 물고 돌아오는 저녁나절.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한결같이 반갑게 맞이하던 포근한 고향집이 있었다.
박 넝쿨이 익어갈 때쯤이면 고향마을엔 가을걷이가 한창이었고, 고향집 마당에는 늘 인정이 넘치고 대대손손 한 우물을 마시며 정붙이고 서로 의지하며 살던 곳. 고향은 정녕 삶의 뿌리였다.
지금의 대평면은 더 이상 우리 가슴속에 살아 있는 그 모습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국난극복의 지난한 삶의 길을 걸어왔던 한민족의 삶처럼 대평면 역시 평탄하지 못한 여정을 달래야만 했다.
남강댐 건설. 이는 당시 진주가 생겨난 이래 최대의 역사(役事)였다. 진주를 비롯한 삼천포, 충무 등 남강연안지역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지만 대평면에 있어서 그것은 차라리 재앙이었다. 발전의 이면에는 수몰민들의 애환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었다. 자손 대대로 이어온 삶터를 빼앗긴 것은 물론이고, 형제 자매와 이웃들이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새삶을 꾸려야하는 새로운 출발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진양호의 물빛도 짙어졌다. 고향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지만,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짙어가고 있다.
물에 고향을 묻은 대평 사람들은 세상사에 흔들릴 때마다 고향을 생각한다. 가난하지만 너른 들과 마을과 이웃사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넉넉함도 기억한다. 그러나 대평 사람들의 가슴속에 있는 고향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고 있다. 되돌아가 찾아보려 해도 거의 대부분이 푸른 물빛에 갇혀 이젠 더 이상 볼 수도, 돌아갈 수도 없기에 그렇다.
나고 자란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대평에서 정을 쌓으며 그렇게 고향과 함께 늙어갈 줄 알았는데, 텀벙거리며 뛰놀던 어린 시절의 냇가도 아름다웠던 추억들도 이제 더 이상 없다. 보고 싶은 마음은 지금의 호수만큼 큰데, 이제 다시는 볼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고향이 된 것이다.
그러나 대평의 옛 모습과 기억들은 아직도 가슴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대평의 대명사인 대평 무와 남강 최후의 나루터인 상촌 나루터, 한국전쟁의 극한 이데올로기의 현장을 확인할 수 있는 사평마을 반공유적비,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 노릇을 톡톡히 했던 사평정미소와 마동정미소. 그리고 한때 대평면이 부촌의 반열에 올라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마동시장과 종대거리 시장 등 시장은 없어져 기록으로만 남아 있다.
그리고 선사시대유적의 발견으로 대평면이 남부지방 고대문화의 발원지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대평팔경’과 ‘마동팔명지’는 살기 좋았던 옛 대평면의 기억을 한 편의 영화처럼 떠올리게 하고 있다.
‘대평’하면 곧바로 떠올렸던 대평 무는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고 있다. 이는 대평 무가 지난 시절, 대평 사람들의 삶과 경제의 중심에 서 있었음을 의미한다. 임금에게 올렸던 진상품으로 유명했고, 신풍리 앞 벗들과 대평리 한들 등지에서 앞다투어 재배했던 무는 1960년대에는 당시 진양군의 16개면에서 생산되는 무의 30%를 차지할 정도였다. 쌀 한가마니의 가격으로 거제포로수용소에 납품할만큼 대평 무의 유명세는 대평면을 부촌으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인 매개체가 되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에 길이 생겨 났듯이, 강이 있는 곳에는 나루터가 생겨 물길을 열었다. 상촌리와 대평리를 잇는 유일한 상촌나루터. 남강에 나룻배가 최초로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남강변에 생겼다가 사라진 수많은 나루터 중에 마지막까지 존속한 진주 최후의 나루터이다.
불과 몇 년전 만들어진 대평교로 인해 지금은 옛 영화를 뒤로 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상촌나루터는 한때 서울의 마포나루에 버금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백양’담배 한 갑이면 적어도 이틀 정도는 무료로 태워 주었던 사공의 순박한 인심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전해지고 있다.
한 해 쌀 농사의 끄트머리에 있지만 농부들의 가슴속에서는 항상 중심에 있던 사평정미소.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어른들의 사랑방이기도 했다. 농촌 들녘의 모든 길이 정미소로 이어지던 시절, 멍석한만 크기로 날아들던 참새 떼와 앞마당에 넘치던 나락냄새. 바삐 움직이던 마을사람들로 그득하던 정미소들은 시대를 이어 숨가쁘게 달려왔지만 남강댐 건설 이후 대평의 아픈 역사처럼 그 삶을 다하고 말았다.
대평면은 남부지방 고대문화(古代文化)의 발원지이다. 대평면 일대의 남강(南江)변에서 구석기문화와 신석기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었고 이어 청동기시대, 삼한시대로 이어졌음을 증명하는 수많은 선사유적(先史遺蹟)들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제공한 생명의 젖줄인 남강(南江)과 그와 이웃해 삶 터를 꾸렸던 대평 사람들. 진정 진주문화사(晋州文化史)의 첫 페이지를 연 것은 진주 문화의 뿌리인 대평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대평 사람들은 운명적으로 남강과 더불어 삶을 꾸려왔다.
그런 대평인들은 한순간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새로운 대평면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남강댐 숭상으로 면 소재지가 새로운 준도시지역으로 조성되면서 지방도와 순환도로 등 사통팔달의 도로망과 천혜의 자연환경과 자원을 갖춘 미래 근교시설 농업단지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남강 하도개량 매립지 조성사업이 본격화되면서 대평리 일대에 딸기특화단지가 조성돼 대평 무가 구가했던 대평면의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더불어 대평면은 지금 새로운 관광지로 태어나고 있다.
진양호와 푸른 물빛을 감상할 수 있는 일주도로의 개통과, 물안개공원에 오르면 문득 기억해 내는 넓고 넓었던 대평의 추억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강 위를 노니는 철새들을 사시사철 볼 수 있고, 인근에 세워지고 있는 남강선사유적박물관은 대평이 신 관광지역으로 거듭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는 대평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가늠하게 해 주는 망향정이 이주단지에 세워졌다.
지리산 영봉 아래 남강수 휘돌고
비옥한 들 넓은 들 대평은
머나먼 예로부터 이름난 고을
할배 할매 묻힌 이곳
찾는 사람 뜸해도
떠난 사람 그립네
이 땅을 지키는 사람들 뜻 모아
고향을 그리는 마음
이 돌에 새기니
따스한 햇빛 스치는 바람
여기를 지나거든
잠시 멈추어 진양호를 바라보며
정든 고향 옛 정을
다시 한 번 새겨라
대평사람들은 때로는 기억한다.
어은·대평·옥방·상촌·중촌·하촌·사평·당촌·내촌·신풍마을이 지닌 향기와 넉넉했던 사람들의 모습들, 그리고 풀어내도 끝이 없는 대평의 이야기들을 기억한다.
옛 길을 다시 찾았지만 볼 수 없었고, 옛 마을과 옛 사람을 찾았지만 그곳에 없었다. 단지 기억으로 더듬을 수 밖에 없었다. 대평면(大坪面)이 끝내 지울 수 없는 아픔이기도 하다.
대평면지를 엮으며 미처 찾아내지 못한 대평의 기억과 옛 모습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그러나 때로는 기억만으로도 남겨두는게 좋을 때도 있다. 문득 꺼내기보다는 가슴속 한 켠에 가만히 묻어 두는 것이 덜 아프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평면지(大坪面誌)는 대평사람들의 아픈 기억이면서 한편으로는 그들만의 삶과 문화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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